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징웨이 공작 (문단 편집) === 일화신관계조정요강의 체결 === 일본에서 돌아와 톈진으로 들어온 왕징웨이는 우페이푸와 면담을 요청하고 그의 협력을 구하면서 그에게 군권을 맡아달라고 했지만 우페이푸는 왕징웨이와의 면담을 취소해버렸다. 이어 왕징웨이가 우페이푸에게 편지를 써서 그를 설득하려 하자 우페이푸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에 일본이 직접 나서 우페이푸 설득을 시도했으나 우페이푸는 일본의 선제 철군을 요구하면 출마하겠다고 하였고 얼마 안 있어 우페이푸는 치과 진료 중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우페이푸의 협력을 구하는데 실패한 왕징웨이는 6월 27일 베이징의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수괴 왕커민과 만나 새로운 중앙정부 수립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으나 왕커민은 사실 왕징웨이에게 주도권을 뺏기기 싫어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6월 28일 상하이로 돌아와서 일본군 화남 파견군 참모부장 사토와 함께 신정부 수립에 착수했으나 6월 29일 왕징웨이와 만난 난징 중화민국 유신정부의 수괴 량훙즈는 왕커민보다도 왕징웨이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며 합병을 노골적으로 반대, 유신정부와 왕징웨이의 신정부 통합 문제는 논의되지조차 못했다. 왕징웨이는 장파쿠이를 비롯하여 광둥의 반장 군벌들을 다시 한번 회유하려고 했으나 이들은 모두 왕징웨이를 무시했다. 7월 5일 왕징웨이는 량훙즈와 2차 회담을 가졌고 량훙즈는 유신정부의 인사들을 기반으로 신중앙정권 설립을 요구함으로 왕징웨이를 배제하려 했다. 왕징웨이는 자신이 중국의 정통한 영수라 주장하며 8월 28일 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회의를 소집하고 233명의 대표를 모아 스스로를 주석으로 삼고 반공의 국책화와 중일관계 정상화를 천명했으나 1939년 9월 난징에서 열린 왕징웨이-량훙즈-왕커민 3자회담에서 국민당 전국대표대회가 아닌 중앙정치회의 구성과 소집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며 중앙정치회의는 국민당, 임시정부, 유신정부가 각각 3분의 1의 지분을 차지한다는 조건이 합의됨으로 왕징웨이가 원하던 자신이 주도하는 정부가 아닌 기존 괴뢰정권들과의 대등한 합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9월 12일 일본은 지나 파견군 총사령부를 난징에 설치하여 왕징웨이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10월 24일 왕징웨이에게 중앙정치회의 지도요강을 내놓아 이를 강요했다. 여기엔 모든 분야에 일본인 고문을 참석시키며 군사 고문단엔 독일, 이탈리아를 배제할 것을 명시하여 왕징웨이의 모든 희망을 짓밟는 내용이 가득했다. 일본의 너무 가혹한 요구에 일본측의 가게사 사다아키도 괴뢰국을 만들려는 것이냐며 반발했다. 게다가 분치합작주의를 주장하던 일본은 화북을 국방상, 경제상 특수지역으로 규정, 일본이 독자적 권한을 가지겠다고 했고 방공 주둔권, 치안 주둔권, 주둔 지역 내의 철도,항공, 통신, 주요 항만, 수로의 군사상 요구권 및 감독권, 일본군 군사고문단의 중국군 지도권을 요구했으며 거기에 중국 전역의 항공지배권, 국방상 필요한 자원 개발 이용에 관한 기업권, 몽강의 경제지도권과 참여권, 화북의 철도장악권, 화북의 무선통신 일화 공동경영권, 화북의 국방상 필요 매장자원 개발이용권, 화북 국방상 필요사업 합동사업 참여권, 화북 정무위원회 경제행정 지도권, 만주국 승인도 요구했다. 중국의 노예화라 해도 할말이 없는 매우 가혹한 요구였고 왕징웨이는 가게사에게 격렬히 항의했다. >"이런 안은 화평운동에 치명적인 문제를 초래할 뿐이다. 만약 당신이 이 안에 일방적으로 양보한다면 당신이 일본 정부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도 참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이 교섭은 없었던 것으로 했으면 한다. 나로서는 화평의 신념에 변함없지만 정부 수립이라는 방법은 포기하는게 어떨까 싶다." 가게사는 도쿄로 가서 왕징웨이의 항의를 전달하면서 조건 완화를 호소했으나 다들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참모본부는 장제스가 화평에 나선다면 조건을 완화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왕징웨이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왕징웨이와 교섭을 맡던 매기관이 너무 안이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육군상 하타 슌로쿠와 육군차관 아나미 고레치카, 군무국장 무토 아키라는 이러한 입장을 확실히 표명하며 교섭을 정리하라고 했고 가게사도 포기하고 상하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12월 30일 왕징웨이는 화중과 화남을 지킨다는 구실로 일화신관계조정요강에 서명하였고, 이에 량훙즈조차도 왕징웨이가 일본의 화북지배를 인정해버렸다고 비판했다. 왕징웨이는 울며 변명했다. >"중국과 같은 대국이 나 따위에 팔릴 나라는 아니다. 비록 내가 조인하더라도 그것은 내 몸을 파는 계약에 지나지 않는다." 가뜩이나 [[저우포하이]]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고 불만이 많았던 가오쭝우 등은 왕징웨이에게 완전히 환멸을 느끼고 1940년 1월 4일 장제스의 지시를 받은 [[다이리]]와 두웨성의 공작에 포섭되어 일화신관계조정요강의 내용을 소지한 상태로 홍콩을 통해 탈출하였다. 일화신관계조정요강의 내용은 1월 20일 장제스에게도 보고되었고 1월 21일 전국적으로 보도되었다. 여론은 과거 [[21개조 요구]]의 2배에 달하는 것으로 중국을 속국화하려 한다고 분노했고, 왕징웨이는 1월 22일 보도된 내용은 최초 시안이라 조인된 내용과 다르다고 변명했으나 일본의 영자 신문 재팬 타임즈는 이 내용이 내각의 비준을 받은 것이라며 확인사살을 해버렸다.(...) 1940년 1월 23일 칭다오 회담에서 왕징웨이는 임시정부, 유신정부, 몽강정부 대표와의 회담을 통해 베이징 임시정부와 유신정부를 폐지하고 왕징웨이의 중앙정부에 흡수하는 것을 확정하는 한편, 화북정무위원회 설치를 통해 일본의 화북 지배를 기정사실화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